◆ 노르카프가 있는 노르웨이를 12일간 종단 후 떠나다.

*1996년 7월 21일 일요일 맑음 (여행 24일째)

 

오슬로-예테보리, 주행거리 267㎞, 주유량 25.80ℓ, 금액 NOK225-

오늘은 노르웨이를 떠나는 날이다. 아침 9시 팬션을 출발했다. 햇볕이 쨍쨍 하다. 거리는 노출증환자들의 천국이고 왕궁과 국립극장, 그리고 대성당을 들러보았다. 입센의 집을 옮겨다 놓은 민속박물관을 보려했는데 주차장이 만원이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너무 지쳐있었다. 20여 일이 넘는 여행기간과 더워진 날씨, 그리고 이젠 노르웨이를 떠난다는 풀어진 마음이 조그마한 일에도 짜증을 낸다. 국립미술관을 관람하기가 힘겨워 중도에서 나오고 말았다. 하루에 500㎞씩 달리며 낯선 곳을 헤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더욱 그렇다.

오슬로 대성당

카를 요한 거리를 내려다 보는 왕궁

바이킹 배 박물관, 프람호 박물관, 콘티키호 박물관을 찾아갔다. 바이킹 배 박물관에는 1904년에 여왕의 무덤에서 발굴한 800년대, 50년 동안이나 여왕이 타던 오세베르 바이킹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외에도 두 척의 바이킹배가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이들의 스케일이 놀라웠다.

북극과 남극 탐험에 사용되었던 배 프람호. 아문젠이 영국의 스코트와 사투를 벌렸던 항아리모양의 배 프람호. 세계 최초로 유일하게 북극과 남극을 갔던 배 프람호의 구석구석을 보면서 인간의 꿈이 얼마나 집요하고 위대했던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네가 초등학생시절 아문젠 이야기를 읽고 그의 탐험정신에 감동했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아문젠이 타고 갔던 프람호를 보는 기분이 짜릿했다. 40여년을 돌아와 만난 아문젠과 프람호. 탐험에 온 정열을 쏟았을 그의 체취를 느끼며 나는 많은 감명을 받는다.

오슬로 국립미술관

콘티키호 박물관 안에서

콘티키호 박물관은 1947년에 헤위에르달이 남미에서 폴리네시아로의 문화 이동설을 실증하기 위해 만들어 행해했던 뗏목선 콘티키호와 그 이후 고대 이집트에서 남미로의 문화 이동설을 실증하기 위해 만들어 항해했던 파피루스 배 라2호가 전시되어있었다. 바이킹의 후예답게 이들은 모험과 도전과 넓은 가슴으로 끝없이 바다로 나간 흔적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바이킹의 자취에서부터 천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C 초의 탐험정신까지 노르웨이 역사를 보며 나는 우리부부의 여행 역사인 14년 여행경력을 되짚어 본다. 1983년부터 시작된 떠돌이 생활 14년. 줄기차게 떠돌았던 14년 세월을…. 그냥 운명적으로 정착을 해서는 안될 것 같은 그 무엇이, 왠지 떠돌아야 할 것 같은 숙명이 늘 그림자처럼 우릴 따라다녔다. 그래서 좀더 멀리, 좀더 길게, 좀더 힘들게 세상을 돌아다녔다. 긴 백야여행의 끝마무리인 이 순간, 많은 감동이 마음속에서 회오리바람이 된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전쟁 후의 평화처럼…. 소중한 경험들이 삶의 갈증을 시원히 풀어주는 듯 하다. 이젠 우리도 이쯤해서 떠돌이 철학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보다. 평범한 일상의 위대한 가치가 보석처럼 귀함을 절실히 느낀 여행이다. 일상으로 돌아가자. 일상에 충실하자. 일상의 고마움이 마음 가득 채워진다.

오후 2시 20분. 노르웨이를 떠나 스웨덴 예테보리로 가기 위해 콘티키호 박물관을 출발했다. 드디어 노르웨이를 떠난다. 우리부부의 꿈의 실체였던 노르웨이와 작별이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맷돌에 가리는 곡식처럼 범벅이 된다.

예테보리까진 280㎞를 달려야 한다. 남편이 힘차게 패달을 밟았다. 오슬로를 뒤로하고 동남쪽 방향으로 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날씨는 쾌청하고 햇빛은 따가웠다. 점점 차내 온도는 올라가고 웃옷을 다 벗고 얇은 티셔스만 입었는데도 땀이 철철 흐른다. 처음으로 에어컨을 틀어야겠다는 생각에 계기판에서 에어컨 사인을 찾았다.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아서 차를 갓길에 세웠다. 역시 에어콘은 없었다. 여행 24일 만에 차에 에어컨이 없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유럽차에는 에어컨이 없는 차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고 노르카프가는 길에서 만난 우리학생들도 에어컨이 없는 차를 빌렸다는 얘기를 했었다. 바로 우리 차가 에어컨 없는 차일 줄이야…. 여행 내내 날씨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 좋지 않은 날씨 덕에 에어컨 없는 차로 불편 없이 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다 뜻이 있다'는 평소의 좌우명이 떠올랐다.

한시간 삼십분 쯤 달려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국경인 작은 강에 이르렀다. 시간은 오후 4시. 우리는 차를 세웠다. 이대로 노르웨이를 떠날 수는 없었다. 많은 감동을 준 노르웨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편지를 썼다. 그리고 감사와 이별의 인사도 했다. 임진각에서 북쪽 고향땅을 바라보고 망향제를 올리는 실향민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안녕! 노르웨이여…. 다리를 건너 스웨덴으로 넘어왔다.

노르웨이를 떠나 스웨덴으로 왔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그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서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진 느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에어슨 해협을 건너 스웨덴 말뫼에 도착했을 때가 7월1일 이었으니 이십 여일 만에 다시 스웨덴으로 온 셈이다. 산악국가인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지형이 달라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평평한 평원인 스웨덴은 피곤에 지친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국경을 지나 20여㎞쯤 달려서 큰 건물이 줄지어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저녁 찬거리를 샀다. 대형 슈퍼마켓의 푸짐한 먹거리를 보는 순간 시장기가 확 돌았다. 점심때 오픈샌드위치로 간단하게 먹은 탓에 더욱 그랬다. 우리는 오랜 만에 푸짐한 저녁 장을 봤다. 맥주와 오이 절임, 고추 절임, 겨란, 햄, 야채 등 푸짐한 저녁찬거리를 샀다. 부자가 된 듯 흐뭇하다.

우리의 일정은 스웨덴 제2의 도시 예테보리까지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노르웨이는 자연경관이 좋은 곳이나 물이 있는 곳에는 꼭 캠핑사이트가 있었다. 그런데 스웨덴은 E6번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캠핑사이트 표시가 눈에 띄지 않았다. 펀펀한 평원과 농가뿐인 자연환경이 캠핑사이트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인가보다. 말뫼를 떠나 스톡홀름으로 갈 때도 캠핑사이트나 유스호스텔이 없어서 우린 비싼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었다. 예테보리 80㎞라는 사인을 보면서 고속도로 변의 사인보드를 살폈다. 잘 곳을 찾기 위해서다. 오늘은 많이 지쳐있었다. 빨리 쉬고 싶었다.

방 있음(HYTTER). 반가웠다. 오두막(Cottage) 사인이 아니라 빈방이 있다는 표시를 따라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민가가 있는 방향으로 2㎞정도 들어갔다. 농가가 있었다. SEK240(우리 돈 약 \30,000-)을 지불하고 빈방에 여장을 풀었다. 쌀을 씻어 밥을 짓고 꽁치 캔에 풋고추를 넣고 얼큰하게 조리고, 풋마늘 장아찌에 불고기, 시원한 맥주 한 캔, 저녁상이 푸짐하다. 뒷뜰에 만들어 놓은 간이 샤워장에서 샤워도 하고 풀내음 솔솔 들어오는 스웨덴의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우리. 몸은 피곤한데 '노르웨이를 떠나면서' 라는 긴 글을 일기장에 쓰면서 나는 이런저런 개똥철학에 빠져 밤 깊어 가는 줄 모른다.

[목 차]  [전날 1996년 7월 20일]  [다음날 1996년 7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