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겔란, 바이킹 선, 남극을 탐험한 프람호 그리고 뭉크

*1996년 7월 20일 토요일 맑음 (여행 23일째)

오슬로, 주행거리 20㎞

 몹시 고단하고 피곤하다. 그래도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어디론지 떠나야 한다는 나그네의 잠재의식 때문인가 보다. 여기가 뉴욕의 인터내셔널 하우스인가 잠시 착각에 빠진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높은 천장, 사방이 온통 흰색인 방, 방의 크기와 분위기가 몇 년 전 내가 6개월간 머문 뉴욕의 인터내셔널 하우스와 비슷했다. 몹시 고단했었나 보다. 그리고 오슬로까지 왔다는 안도의 마음이 긴장을 풀게 했나보다. 폭신한 이불을 끌어당겨 목 위까지 덮었다. 더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늦게 오슬로에 도착한 우리는 해안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몸 컨디션이 나빠 꼼짝하기 싫은 나를 두고 남편 혼자서 차에서 내렸다. 중앙역 근처의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가 숙소를 정하고 돌아올 때까지 한시간 이상이 걸렸다. 차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불안해했던 마음이 아침에 몽롱함으로 나타났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아침햇살이 들어오는 팬션의 깨끗한 실내를 둘러본다.

역시 오슬로는 큰 도시다. 곳곳이 일방통행이고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아서 우리가 묶은 팬션이 시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곳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길을 찾느라 애쓰는 에너지가 이젠 지겹다. 많이 지쳤나 보다. 3시간 주차요금을 내고 주차를 하는데 꽤 시간을 허비했다. 3시간 시티투어로 비겔란 조각공원, 바이킹 박물관, 프롬호 박물관, 스키 점프대 등을 돌아봤다. 여행 23일 만에 처음으로 덥다는 생각을 했다. 베르겐에서부터 햇빛을 보기 시작했었지만….

 프롬네르 공원의 비겔란 조각 작품들

 비겔란의 대표작 중 한 조각

비겔란 조각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프롱네르 조각공원은 그 방대한 규모에 놀랐다. 남편은 조각을 좋아한다. 조소를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650여 점의 인간상을 돌에 조각한 구스타프 비겔란의 열정이 느껴지는 조각공원에서 남편을 많은 감명을 받는 듯 했다.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갖가지 삶의 형태를 형상화한 작품들이 광대한 부지에 전시되어 있었다. 121명의 남녀노소가 뒤엉켜 있는 17m높이의 화강암 탑인 모놀리트는 비겔란 조각의 압권이다. 한 예술가가 일생동안 이렇게 정열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대함을 보여주는 구스타프 비겔란.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게 여행을 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같은 맥락이라고 자찬을 하며 우리는 오랜만에 유쾌하게 소리내며 웃었다.

800년대의 바이킹 배

남북극을 탐험한 프람 호

오후 2시가 넘어서 서울 가든이라는 한국음식점을 찾아갔다. 한국식 외식은 집 떠난 후 처음이다. 불고기와 육개장과 김치 등으로 얼큰하게 점심을 먹고 나니 마음까지 든든하다. 18년 되었다는 1.5세대의 핸섬한 사장 아들은 우리 같은 여행객은 처음 본다며 날보고 행복한 줄 알란다. 남편 같은 한국남자는 천명 중에 한 명도 없다고. 서울 가든에서 영양보충은 물론 심리적 보충까지 한 우리는 다시 힘이 솟는다. 즐거운 대화와 오랜만에 먹은 한국음식으로 힘을 얻은 우리는 "한국에 있으면 답답하겠어요"라는 젊은이의 말을 뒤로하고 다시 낯선 거리로 나섰다.

오슬로 시청

오슬로 국립극장

오늘은 토요일 오후. 오슬로항 주말 거리는 인파로 축제분위기 같다. 음식점들이 색색의 배모양을 하고 바다에 떠있다. 배 위에선 각종 생음악이 연주되고 요리를 먹고 음악을 들으며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북구의 여름이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보행자거리에도 사람들로 만원이다. 오슬로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빨간색 전차가 다니고 롤러보드를 타며 묘기를 부리는 젊은이들의 싱싱함이 빛난다.

요한슨 거리 풍경은 더욱 재미있다. 어느 도시처럼 거리의 예술가들이 활기 찬 주말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멋진 곡예를 보여주는 곡예사, 분장을 하고 스스로 조각품이 되어 정물처럼 서 있는 자칭 예술가, 푸른 잔디밭에서 관광객들에게 안마와 지압을 해주고 있는 안마사들….

햇빛 쨍쨍한 오후의 이색적인 풍경은 일광욕하는 사람들이다. 아예 일광욕하는 잔디밭이 지정되어있다. 계단처럼 잔디밭은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벌거벗고 Sun Bathing을 한다. 멀리서 보면 꼭 밤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햇빛에 벌겋게 탄 피부가 핑크 빛으로 보이고 푸른색과 어울려 뒤척일 때면 꼭 밤벌레처럼 보인다. 아루케후스성에 갔을 때도 남녀가 벌거벗고 잔디밭에 누워 포옹을 하고 있었다. 북유럽 특유의 햇빛에 대한 갈증이 낳은 이들의 문화를 이제는 이해 할 수 있었다.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

뭉크 미술관 내 커피 숖

우리는 뭉크 미술관으로 갔다. 에르바르트 뭉크.(1863년∼1944년) 몇 년 전 MBC 주말연속극 김윤경 작 '서울의 달'에서 뭉크라는 화가를 처음 알았다. '서울의 달'에서 윤미라와 연애 중인 중학교미술선생님은 뭉크라는 화가를 들먹이며 무식한 윤미라 앞에서 폼을 잡았고 다 큰 딸 하나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는 윤미라는 미술선생님과의 재혼을 꿈꾸며 카페 뭉크를 경영하면서 아는 척 미술선생님과 맞서 던 해학적 하이 코미디 '서울의 달'에서 나는 뭉크를 알게 되었다.

핀란드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을 관람한 이 후, 에르바르드 뭉크 미술관에서 다시 문명 속으로 돌아온 나를 확인한다. 자연 속에서 한없이 작아졌던 나는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그림이 뭉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그도 그랬고 비겔란도 그랬고 뭉크도 그랬듯이 노르웨이의 예술가들은 노르웨이의 자연만큼이나 깊고 컸다. 이지적인 뭉크의 모습. 날카로운 눈빛, 오똑한 코, 싸늘한 이미지의 뭉크 사진에서 죽음의 그림자와 병약함과 평생을 싸워야 했던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뭉크는 80세를 넘기며 장수함으로써 그의 정신병력을 극복한 삶이 낳은 감동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냉철한 이미지의 뭉크. 뭉크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뭉크의 많은 그림은 노르웨이를 여행한 나에게 그리 생소하지만은 않았다. 에르바르드 뭉크를 자세히 알게 된 것도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었다. 우리는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그려진 티셔츠를 NOK195(우리 돈 약 \25,000-)에 샀다. 나는 그와의 깊은 만남을 기쁨으로 간직할 것이다.

팬션으로 돌아오는 길. 일광욕하는 밤벌레 같은 사람들을 다시 본다. 백야와는 반대로 겨울 내내 해가 뜨지 않는 북구의 자연환경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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