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그와 한자동맹 그리고 우리 라면 Mr.Lee

*1996년 7월 18일 목요일 햇빛 (여행 21일째)

베르겐, 주행거리 38㎞

 6월 28일 한국을 떠난 지 21일 째가 되는 오늘, 처음으로 햇빛을 하루종일 볼 수 있었다. 굳은 날씨로 여행이 힘들던 나그네에게도 햇볕은 이렇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데 일년의 ⅔가 흐린 날씨라는 베르겐 사람에겐 말해 무엇하리. 아침 10시부터 시작되는 시티투어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사람들의 차림새가 확 달라진 거리 풍경이 어제와 사뭇 다르다. 베르겐 사람인지 관광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들 온통 허연 살은 드러냈다. 푸른 잔디밭엔 일광욕하는 사람들이 딩글고 아예 윗통은 벗고 지나가는 남자들도 꽤 많다. 북구사람들의 태양을 향한 해바라기 마음을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나그네인 우리도 햇빛이 이리 반가운데….
가에 차를 파킹하려고 파킹스탠드에 돈을 넣었더니 어느 정도 돈을 먹고는 나머지는 뱉어낸다. 여러 번 해봐도 마찬가지다. 이상해서 기계에 써있는 글은 잘 읽어보니 '2시간 이상의 주차는 안됨' 이었다. 4시간의 주차요금을 넣으니 뱉어낼 수밖에. 역시 노르웨이도 우리 나라보다 한 수 위였다. 함께 하는 시민의식이 이런 작은 일에서도 나타났다. 우린 3시간 시티투어를 해야 하는데 주차할 일이 난감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우릴 보고 파킹하우스에 가면 얼마든지 오래 주차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우린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바로바로, 뜻 한대로, 편리한데로, 즉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젠 짜증이 난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마음의 여유를 더 찾기도 하는 묘한 이중성을 매일 경험한다. 주차문제만 해도 그렇다. 파킹하우스를 찾아가는 일이 번거롭다는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생각과 합리적인 주차방법이다라는 긍정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이 순간적으로 충돌한다. 투어시간에 늦을까봐 조바심을 하며 파킹하우스를 찾아갔다.

여름 한 철 베르겐을 관광객으로 만원이다. 유럽관광객 속에 유일하게 낀 동양인인 우리.(동양인들은 단체관광객이 대부분이니깐) 베르겐 시내를 돌아보고 구시가지에 있는 Gamla Bergen Museum으로 갔다. 18∼19С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야외박물관으로 피오르드 연안의 여러 계층의 삶을 알 수 있는 건물들을 옮겨 와 한곳에 모아 놓은 곳이다. 빵집, 이발소, 치과병원, 사진관 등 35동이 넘는 건물들은 서민서부터 귀족들까지 그 당시 모든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귀족의 집 내부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카메라에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베르겐에 있는 그리그의 집

지붕위에 잔디를 이은 그리그 음악당

시티투어의 마지막 코스 트롤스하우겐(Troldhausen)은 베르겐 교외에 있는 에르바르트 그리그의 집이다. 음악당과 박물관이 집 옆에 있고 그가 부인 안나와 같이 묻힌 곳 트롤스하우겐. 음악당 한켠에 있는 그의 실물 크기 동상은 키가 너댓자 밖에 안될 것 같은 너무도 작고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이다. 노르웨이의 자부심 에르바르트 그리그. 베르겐의 아름다운 피오르드가 앞마당의 호수처럼 펼쳐진 곳. 그는 이곳에서 22년간 살면서 당대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의 예술세계를 키워갔다. 오래 전에 깊게 읽은 책, 스테판 츠바이크의 '오늘의 세계'에서 일, 이차대전 전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비엔나를 중심으로 유명인사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문화의 꽃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그리그의 응접실에서 확인된다. 그리그가 교류했던 많은 인사들의 사진과 서신이 그의 응접실에 빼곡이 걸려있었다. 막크투웨인, 아인슈타인, 슈만, 파가니니, 입센 외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사진과 이름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그 박물관

암벽을 뚫어 만든 그리그 내외의 묘

그의 집 바로 옆에 있는 그리그 박물관에서 감동적인 아주 짤막한 문장과 마주쳤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음악에 최대의 영향을 준 것은 노르웨이의 자연과 그의 친구들이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장엄한 자연을 열흘 넘게 보고 왔다. '인간을 무시하는 듯한 자연'이라는 표현으로도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무한한 노르웨이의 자연이다. 경외 그 자체 일 수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노르웨이의 자연. 덤처럼, 개평처럼, 나의 존재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노르웨이의 자연이다. 나는 돌아가 두고두고 노르웨이의 자연을 곱씹으며 살 것이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다. 그리고 그리그 박물관에서 만난 이 말은 나의 북유럽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 할 감동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내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이 말속에 함축되어있는 것 같아서다.

시티투어를 마치고 어시장으로 갔다. 베르겐 관광 1번지 어시장엔 화창한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우리도 게와 연어 그리고 새우를 얹은 오픈샌드위치와 구운 옥수수를 사 먹기도 하고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여유로운 베르겐의 오후를 즐겼다. 얼마만인가!!! 도시의 인파 속에서 이제야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온 편안함이 날개를 편다. 기분 좋은 오후. 뿌듯한 자긍심. 아! 이 자유….

햇볕은 점점 뜨거워지고 허연 살은 드러내고 햇빛 쏟아지는 잔디에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끈달린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금발머리의 두 아가씨 옆을 밍크코트에 밍크 털모자까지 쓰고 지팡이를 짚고 지나가는 할머니를 본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의 두 삶이 퍽 대조적이다. 여행 내내 햇빛이 그리웠고 비오는 날씨가 두렵기도 했었다. 그러나 벌거벗고 밖에 나와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문화가 다르다라는 개념보다는 사람은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앞선다. 얼마나 햇볕이 그리웠을까? 이해가 되기도 했다.

관광객이 즐겨 찾는 브뤼겐 거리

중세의 정취가 풍기는 한자 박물관

브뤼겐 거리로 다시 나왔다. 유명한 한자동맹시대의 삼각지붕 건물들이 중세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한자박물관엔 16세기 말린 대구를 팔며 부를 쌓던 독일 상인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보존되어있었다. 도시 한끝에 있는 마리아 교회의 예쁘고 아담한 내부는 앙증스럽기까지 했다. 내일 베르겐을 떠날 우리는 베르겐 교외에 있는 12C 바이킹 시대의 특이한 목조건물인 스타브 교회를 보기로 했다.

오후 3시가 지난 시간에 파킹하우스로 갔다. 스타브 교회가 있는 교외로 가기 위해 서둘러 차를 빼다가 차를 벽에 살짝 쳐 박았다. 요금 정산소를 찾다가 순간의 실수였다. 차의 왼쪽 밤바 앞부분이 살짝 찌그러졌다. 물론 큰 일은 아니다. 차를 빌 릴 때 종합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큰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나의 아픈 상처를 또 건드리고 말았다. 노르웨이에서 속도위반으로 벌금딱지를 받았을 때처럼.

살아오면서 뜻대로 된 일 보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며 산 나다. 조금은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산 나다.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처럼 늘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산 나다. 노력한 만큼 결과를 맺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산 나다. 때로는 실패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산 나다. 그래서 작은 걸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는 나다. 핀란드에서 노르웨이로 넘어왔을 때만해도 그렇다. 속도위반으로 우리는 걸렸지만 우리 앞에서 100㎞이상 달리는 차가 얼마나 많았던가!!! 역시 우리는 재수 없어!!! 라는 생각이. 계획한대로 여행을 깔끔히 마치고 싶은 나의 자존심(?)에 흠이 되었다는 심리가 나를 못 견디게 했었다. 이번에도 우그러진 차를 보는 마음이 내 인생을 보는 것 같았다. 작은 잃음이 큰 얻음의 빛을 퇴색시킨 안타까움 같은 내 내면의 앙금이…. 엉망이 된 기분을 달랠 길 없었다.

1,200년대의 목조 건물인 스타브 교회

베르겐의 마리아 교회

스타브(Stav) 교회는 12C 초에 세운 목조 건물로 보존을 위해 1883년에 송네 피오르드에서 베르겐 교외의 이곳으로 이전해 놓았다고 한다. 스타브 교회는 노르웨이 선전책자에도 나오는 아주 특이한 목조 건물로 바이킹시대의 자취라고 할 수 있는 용머리를 지붕 위에 여러 개 조각해 놓은 이색적이고 신비스런 목조 건물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우린 겉모습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슨 역할을 했고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스타브 교회를 보고 조용한 숲 속 의지에 앉아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사람도 없는 넓은 주차장에서 더러워진 차를 오랜만에 둘이서 깨끗이 닦았다. 이십 여일 같이한 정든 차를 닦으니 내가 목욕을 한 듯 개운하다. 찌그러진 앞부분을 더욱 열심히 닦았다. 옹졸한 내 마음을 닦듯이. 세상살이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지…. 엎칠락 뒷칠락이며 오목이 볼록이인 것을…. 파도타기하 듯 타고 넘으면 되는 것을…. 작은 걸림에도 발끈하는 속 좁은 내가 싫었다. 우리는 새소리가 청아한 숲 속에서 한 시간 이상 명상을 하듯 앉아있었다. 마음의 평정이 찾아왔다.

베르겐으로 돌아왔다. 시내는 여전히 들떠있었다. 공원이 있는 중앙광장에서 거리의 예술가와 곡예사와 관광객들이 어울린 여름 오후의 거리문화가 한참 무르익고 있었다. 그리그 동상 앞에도, 파가니니 동상 앞에도, 입센의 동상 앞에도 박수와 함성 그리고 환호소리가 후끈했다. 거리 예술가들의 자존심을 건, 혼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나도 관중석에서 힘껏 박수를 친다. 외줄을 타며 불붙은 솜뭉치를 돌리고 있는 곡예사는 머리를 지구의 모양으로 깎았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 언더그라운드 문화에서 느껴지는 삶의 질곡이 진지하고도 유쾌하다. 우리는 목이 말랐다. 북유럽에서는 Spar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핀란드에서부터 못 마신 맥주생각이 간절했다.

민박집 근처 Spar에서 찾은 국산 라면

라면 봉지 후면의 한국산 표시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골목에서 Spar를 찾았다. 저녁 장을 보고 혹시 쌀이 있나 싶어 매장을 돌다 맥주를 발견했다. 와∼ 신난다.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바구니에 맥주를 담았다. 그리고 누들 코너에서 Mr. Lee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Mr. Lee? 일젠가 하고 보니 農心이라고 써있다. 농심? 자세히 보니 Made in Korea다. 반가웠다. 농심에서 노르웨이에 라면을 수출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왜 Mr. Lee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우리 라면보다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라면이 Mr.Lee라는 이름으로 베르겐 주택가 Spar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웠다. 농심라면이 아닌 Mr.Lee라면이면 어떠리. 하여튼 기쁨이었다. 세상에는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자극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드러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때문이리라. 맥주와 Mr. Lee라면을 발견한 오늘은 차를 쳐 박는 일이 있긴 했어도 기쁘고 뿌듯한 날이다. Mr. Lee 라면 네 개 샀다. 두 종류가 있는데 내용물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어서다. 집에 돌아와 끊여 먹어 보았더니 우리가 먹는 라면 맛과는 많이 달랐다. 나머지 두개는 기념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러 감정들이 오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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