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네 피오르드를 건너 그리그가 숨쉬는 베르겐으로

*1996년 7월 17일 수요일. 흐림 (여행 20일째)

 

 브릭스달-베르겐, 주행거리 326㎞, 주유량 32.00ℓ, 금액 NOK267-

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좋다. 그러나 떠나야하는 우리다.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는 뒤편 언덕에 제법 큰 허름한 창고건물을 보고 주인 할머니에게 저 곳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주인 할머니는 그러란다. 안으로 들어가니 창고가 아니라 살림집이었다. 겉은 허름해 보였지만 할머니의 손길이 배인 깔끔한 내부가 정갈하다. 식탁보는 풀이 빳빳하게 먹여져있고 무쇠 벽난로는 기름이 반질반질하다. 옛날 우리가 그랬듯이 커다란 액자 속에 가족사진이 빼곡히 들어있고 타피스트리 벽걸이도 예스럽다. 모두 오래된 것들이라는 것은 금새 알 수 있었다. 장성한 자녀들은 결혼하여 도시로 나가고 아이들이 쓰던 방은 게스트 룸으로 활용하며 사는 노인부부의 내실이 어쩜 저리도 정갈할까? 삶엔 정년이 없나보다. 정년은 커녕 삶의 애착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샘솟는 애착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영어를 잘하는 72세 할머니의 뽀얀 피부가 예쁘다. 낡고 오래된 것들을 쓸고 닦고 정성 드리는 마음이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보다 더 아름다웠다. 브릭스달의 농촌을 떠나며 나는 삶이란 단어와 할머니의 뽀얀 피부를 오버랩 시킨다.

오늘은 베르겐까지 가야한다. 우리는 코스를 바꿔 베르겐으로 가는 짧은 루트로 질러가기로 했다. 피오르드의 절경인 송네 피오르드가 시작되는 이곳을 페리로 관광을 한 후 페리에서 내려 다시 베르겐을 향해 달렸다. 여행 이십일 째다. 베르겐이나 오슬로를 향해가는 우리는 이젠 험준한 자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긴장을 풀고 여유를 찾는다. 골든 루트에서의 고비가 여행 최고의 난관이길 빈다. 오후 3시쯤에 날씨가 개이기 시작했고 햇빛을 보는 기분이 날아갈듯 상쾌하다. 이제 베르겐까진 17㎞남았다. 아름다운 베르겐 입성을 앞두고 오랜만에 날씨가 화창하게 개이니 절로 흥이 났다. 우리는 속력을 냈다.

송네 피오르드를 건느는 페리에서

베르겐 어시장에서

베르겐은 노르웨이가 자랑할만한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도시다. 베르겐의 브뤼겐거리는 예상대로 관광객들 차지고 인포메이션 센터에는 안내를 받으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건물 밖까지 늘어서 있다. 베르겐은 트롬쇠를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입을 다물지 못할 뻔했다. 베르겐은 트롬쇠와 비슷한 분위기의 도시만 베르겐이 훨씬 크고 아름답다. 역시 도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물이다. 호수와 바다 그리고 그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도시 분위기. 사진이나 그림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도대체 이런 도시를 만든 사람들의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핀란드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말대로 최대의 모델은 자연이라는 말이 이해되는 도시 베르겐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베르겐을 자랑스러워하는 자부심에 나도 손을 들어주고 싶다. 우리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도시는 서울일까? 한강변에 들어선 괴물 같은 아파트를 빼면?…

브뤼겐 거리의 아름다운 중세 목조 건물들

풀뢰엔 산에서 본 베르겐

브뤼겐 거리는 베르겐의 백미다. 중세목조건물들의 색색의 삼각지붕들, 도시 깊숙이 파고든 피오르드의 아름다운 곡선, 푸른 숲에 둘러 쌓인 예술성 짙은 도시분위기.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와 어울림은 여행객에게도 이 도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된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민박집을 소개받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쉽게 찾았다. 늘 그렇지만 외형보다 내부가 더 깔끔하고 알차다. 이른 저녁을 먹고 풀뢰엔 산 정상으로 가는 후니쿨라를 타러가다 한국인 학생 2명을 만났다. 학생들은 '월드컵 코리아' 스티커를 보고 반가워서 찾아왔단다. "베르겐이 좋지요!" 했더니 자신들은 오늘 왔다가 오늘 떠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단다. 베르겐의 겉모습만 보고 간다고 했다. 잘 모르면 어떠리. 떠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공부인데 애들아…. 세상 곳곳의 많은걸 보고 가라는 덕담을 하곤 우리는 헤어졌다.

풀뢰엔 산 정상에서 한 무리의 한국관광객들을 만났다. 암스테르담을 떠난 후 단체 한국관광객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 피오르드를 따라 설계된 아름다운 도시 베르겐에 반하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도시가 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고 우리 모두는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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