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론헤임을 지나 골든 루트 초입에서 자동차의 이상 발견

*1996년 7월 15일 월요일. 비 (여행 18일째)

 

브렉바쎌브-온달스네스, 주행거리 591㎞, 주유량 27.00ℓ, 금액 NOK240-

오두막 아우렌을 떠나는 아침에도 여전히 비가 내린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따라온 비가 끝내 여행을 함께 한다. 오늘은 트론헤임(Trondheim)을 거쳐 온달스네스(Åndalsnes)까지 갈 예정이다.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캠핑사이트를 떠나며 작은 오두막 아우렌과 귀엽고 작은 등과 처마 끝의 꽃화분을 마음에 꼭꼭 담았다.

트론헤임은 중세 노르웨이의 수도였으며 노르웨이 제일의 대성당이 있는 곳이다. 볼거리가 많은 이 도시에 대한 기대로 비가 그치기를 바랐지만 허사였다. 비는 점점 더 억수같이 쏟아지고 3시간만에 트론헤임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깜깜했다. 역사적인 도시답게 웅장한 니다로스 대사원은 중세의 종교적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사원의 장중함과 위엄이 성가연습하고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갈구하는 기원으로 들리게 한다. 노르웨이의 여름은 어딜 가나 유럽관광객들로 북적된다. 천둥번개가 치는 속에서도 니다로스 대사원이나 중앙광장의 올라브 튀리그바손왕 동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 도시의 창시자이기도 한 왕의 동상과 박물관 그리고 왕궁을 둘러보고 오후 3시경에 트론헤임을 떠났다.

트론헤임 니다로스 대사원

올라브 튀리그바손왕의 동상이 있는 트론헤임 중앙광장

이젠 비가 원수 같다.

200여㎞를 달려 돔바스(Dombas)까지 왔다. 그 동안 노르웨이 국토를 종단하면서 내내 타고 왔던 E6번 도로와도 이젠 안녕이다. 온달스네스로 가는 지방도로 9번으로 갈아탔다. E6번이란 표지만 봐도 반갑던 마음이 또 섭섭하다. 도시에 들렀다 빠져 나올 때면 도시를 빙빙 돌면서 E6번이 어디 있나 살폈고 E6 South란 표지를 보고 방향을 잡곤 했던 E6번. 멀어져 가는 E6번을 보며 서운함을 삭힌다.

중앙선도 없는 좁은 9번 지방도로를 달리는 마음이 하루종일 내리고 있는 비만큼이나 쓸쓸하다. 추워서 옷을 잔뜩 껴입고 있는 내 모습이 구질스럽고,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이놈의 비. 오려면 싫건 오라지…. 젠장…. 쿵쾅거리며 차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꼭 오가는 차들도 거의 없는 어둑한 좁은 길을 달리는 우리의 심장 뛰는 소리 같다. 잘 곳을 정해야 할텐데…. 처량한 생각뿐이다.

온달스네스까지는 53㎞나 남았으니 아직도 1시간이상을 더 달려야 한다. 9번 도로엔 다니는 차량도 없고 우리만 외톨이가 된 듯 쓸쓸하다. 길 양옆엔 하늘에 닿을 듯 병풍같이 솟아있는 검은 바위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백 개의 폭포가 마치 수박껍질의 흰줄처럼 보인다. 날씨가 좋았다면 기막힌 절경일텐데 앞이 안보일 만큼 쏟아지는 비 때문에 경관을 즐길 여유가 없다.

온달스네스 20㎞전부터 캠핑사이트를 찾았으나 방이 없어 돌아 나오기를 벌써 세 번째다. 맹인이 길을 더듬듯 어디쯤엔가에 있을 캠핑장을 찾아 서둘러보지만 그놈의 비 때문에 처량한 마음만 꾸역꾸역 차 오른다.

노르웨이여행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피오르드 외에도 빙하를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슬로에서부터 노르웨이 여행을 시작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노르카프에서 시작하여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면서 처음부터 노르웨이의 엄청난 자연과 맞닥뜨리고 있다. 긴장과 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로 고비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고 베르겐으로 가는 길에 유명한 빙하여행의 절정인 골든루트(Golden Root)를 보려고 E6번 도로에서 9번 도로로 갈아 탄 것이다. 그런데 악천후로 자꾸 사기가 꺾인다.

골든루트로 가기위해 온달스네스까지 108㎞를 달려왔고 다시 바르달로 가는 63번 도로로 갈아탔다. 두 시간 이상을 달렸고 골든 루트가 시작되는 초입까지 왔다. 그러나 이곳에도 오늘밤 우리가 머물 캠핑사이트엔 빈 오두막이 없었다. 워낙 여름철 관광으로 인기 있는 코스여서 숙소 잡기가 쉽지 않았다. 난감했다. 네 번째 캠핑사이트에도 빈방이 없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절망했다. 잘 곳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우리는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이 밤에 위험한 골든 루트를 그냥 넘어 갈 것인가 아니면 길가 어디엔가에 차를 세우고 밤을 새울 것인가 하는 중대한 선택말이다.

바르달까지 가는 협곡인 그 유명한 골든 루트는 빙하와 빙하가 녹아 흐르는 장대한 폭포들과 협곡이 어우러진 절경이 노르웨이 자연의 또 다른 신비를 보여주는 곳이다. 우리는 골든 루트 초입에서 숙박을 하고 내일 아침에 골든 루트의 절경을 구경하면서 위험한 가파른 계곡 길을 넘어 베르겐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빈방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이 밤에 위험한 골든 루트를 넘기야 할 것 같다. 말이 그렇지 대관령 고개를 넘는 것도 아니고 위험한 협곡길을 곡예 하듯 넘어야할 일이 불안을 넘어 무서웠다. 여행 최대의 고비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땐 우물쭈물하면 더 사기가 꺾이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비가 쏟아지는 골든 루트를 넘기로 했다. 밤 8시가 넘은 시간이다.

18㎞쯤 골든 루트를 올라왔다. 협곡엔 빙하 녹아 쏟아져 내리는 폭포소리가 온 산을 삼킬 듯 우르릉 쾅쾅 요란하다. 폭포소리에 우리는 차 속에서도 큰소리로 말은 해야 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가 괴물처럼 보인다. 지옥에라도 떨어진 듯 온 몸이 오그라들며 불길한 예감이 나를 옥죈다. 아무래도 무모한 짓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이 떨린다. 어쩜 여기서????….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점점 더 무서워진다.

바로 그때 차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긴장한 탓이겠지…. 잔뜩 겁먹은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차가 점점 기운을 잃더니 그만 멈춰버린다. 정말로 차가 멈췄다. 환각이 아니라 현실이다. 현실이∼. 그 순간 나도 숨이 턱 멎는다. 그리고는 그냥 멍∼해진다. 자동차의 부속품처럼 멍하니 차 속에 앉아있었다. 아무생각 없이…. 온천지가 폭포뿐인 깊은 협곡. 드디어 차가 움직이질 않는다.

남편이 일어나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우르릉쾅쾅 폭포소리가 우릴 삼킬 듯 진동한다. 이미 넋이 나갔고 나는 감기기운으로 열까지 나서 꼼짝할 수가 없다. 마치 강력 접착제로 자동차 의지에 붙여놓은 인형처럼 말이다. 우산과 손전등을 든 남편이 본네트를 열고 부품들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자꾸 가물거려진다. 이러면 안돼는 데…. 남편을 도와줘야 하는데…. 정신이 몽롱해진다. 허수아비처럼 그렇게 앉아 있는 나.

반대편 산길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취더니 차가 한대 내려온다.

"무슨 일이냐? 도와주겠다."

"엔진에 이상이 생겼나보다."

"네덜란드에서 왔나?(우리 차에 네덜란드 국적표시인 NL자가 붙어있었다) 나는 노르웨이 인이다. 카폰으로 연락할 수 있으니 도와주겠다."

"아직 어디가 이상이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좀더 살펴보려고 한다."

"할 수 있겠느냐?"

"글쎄다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럼 잘 해봐라. 행운을 빈다."

차 불빛이 계곡 밑으로 사라졌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번 여행을 위해 미국에서 두 번 이스라엘서 한번 모두 세 번의 렌트카 여행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렌트카의 정비상태가 얼마나 철저한지 우린 잘 알고있다. 그리고 18일 동안 우리의 '월드 컵 코리아'는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거라는 전제하에 남편은 침착하게 차를 살펴보려고 했었다. 30분 이상 차를 살피고 있는데도 한대의 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폭포소리에 이젠 귀까지 멍멍해지고 어둠 속에서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지 않은 남편을 멍하니 바라고 있었다.

남편이 결정을 내린다. 엔진과열 같다고. 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 수 없으니 올라온 길을 엔진 브레이크로 조심스레 내려가 봐야겠다고 한다. 18㎞ 전, 골든 루트를 따라 올라오기 바로 전에 아래층은 식당이고 위층에 방이 서 너 개 있는 아주 작은 인(Inn)이 있었다. 그곳에도 빈방이 없어서 되돌아 나왔는데 그 집 마당까지 되돌아가서 차 속에서 잠을 자고 내일아침에 어떻게 해보는 도리밖에 없다고 했다. 마침 노르카프에서 랩족이 파는 두꺼운 순록털 가죽 2개를 산것이 있어서 그것을 덮고 자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에 시동을 걸어보았다. 엔진 출력이 약해진 차가 힘없이 피식거리다 꺼진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시동이 걸린 차를 기아를 중립에다 놓고 올라갔던 길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골든루트 초입에 있는 작은 식당 겸 여관

멀리 뒤로 허름한 캬라반이 보인다

인(Inn) 주인은 길 건너편 파킹장에 작은 카라반이 하나가 비어있다고 한다. 낡아서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카라반이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10시가 넘은 시간에 누룽지를 물에 말아 저녁으로 때우고 카라반 소파에 침낭을 펴고 순록 털가죽을 덮고 누웠다. 지치고 지친 몸이 몽롱해지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자다 깨어보면 남편은 일어나 앉았다 밖으로 나가고 다시 들어왔다가는 또 나가고를 반복한다. 미안한 마음은 마음뿐이고 목이 뜨끔뜨끔하고 열이 나서 꼼짝 할 수는 나는 비몽사몽간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부릉부릉 거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남편은 밤새 차를 보고 있나 보다. 허긴 차에 이상이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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