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쉬운 노르카프를 뒤로 하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1996년 7월 11일 목요일. 비 (여행 14일째)

 

노르카프-알타, 주행거리 223㎞, 주유량 35.50ℓ, 금액 NOK338-

 9시에 일어났다. 가랑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상당히 추운 날씨다. 다행이 방에 불판이 있어서 아침밥을 짓기가 수월했다. 날씨가 너무 사나워 텐트를 치고 자는 젊은이들이 괜찮을까 걱정이 됐다. 여행의 큰 획을 그은 오늘 아침은 느긋한 마음으로 아침식탁에서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부부가 백야여행을 결심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다. 노르카프까지 가는 렌트카 여행을 하겠다는 우리의 얘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말리거나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다시 돌아가는데 또 보름정도가 걸릴 것이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 올 때가 더 위험한 고산등반처럼 끝까지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떠날 준비가 다 됐는데도 학생들은 감감소식이다. 텐트로 가 보았다. 잠에 골아 떨어진 학생들을 깨웠다. 매트리스의 바람을 빼고 텐트를 걷고 하는데 너무 추워서 덜덜 떨었다. 한국서 가지고 간 오징어 몇 마리를 학생들에게 주고 돌아서는 마음이 섭섭하다. 여행 잘하라는 인사에 목이 메인다. 벌써 오후 1시다.

 

안개 낀 노르카프의 지구의

 

지난 밤 백야를 보려고 지구의 주위에 모인 관광객

짙은 안개와 가랑비로 시계가 잔뜩 흐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노르카프에 다시 왔다. 그 많던 사람들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텅 빈 절벽 위에 지구의모형만이 쓸쓸하다. 곧 여름이 끝나면 이곳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긴긴 정적에 파묻히겠지…. 자욱한 안개 속을 두꺼운 겨울옷에 후드까지 쓴 남자가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있다. 영화의 라스트 신 같다. 저 남자는 왜 혼자서 벼랑 끝으로 가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아니 무엇을 버리려고 노르카프의 절벽으로 가는 걸까? 그냥 외로워서? 아니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실없는 상상을 하던 나는 저 남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개 속같이 희미하고, 아득하고, 베일에 가려진 낯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동경으로 여기까지 온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

 

1907년 태국 왕이 바위에 남긴 최초의 방명록

 

우리가 남긴 방명록

몸도 녹일 겸 카페테리아로 들어왔다. 건물 내부의 한 벽면이 낙서로 뒤덮여있다. 1907년 노르카프를 방문한 태국의 왕이 바위에 사인을 한 것이 최초의 방명록이 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돌 벽 위엔 빽빽이 사인을 해 놓았다. 그 중엔 '한국의 딸 다녀가다'라는 한글 사인도 있었다. 우리도 빈 구석을 찾아 내 이름과 남편이름을 써놓았다. 특별한 곳을 찾은 특별한 사람들이 남긴 사인 속에 작은 흔적 하나를 남기고 안개와 바람이 휘몰아치는 노르카프를 미련 속에 떠났다. 또 눈물이 핑 돈다. 오후 3시였다.

 

 노르카프 방문 증명서

이제는 귀로다. 올 때처럼 북유럽 곳곳을 주유천하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안개가 짙게 낀 가파른 길은 넘어질 듯 구불구불 돌아 내려오며 알타(Altta)를 향했다.

사람은 마음으로 살고 마음으로 한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게 뭉클 집이 그리워진다. 많은 갈등과 갈증이 엉켜있는 일상이 있는 곳. 그 힘듬이 그리워진다.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과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이 늘 교차하는 삶. 그곳으로 가는 귀로가 시작됐다.

알타까지는 혼닝스보그에서 40분간 페리를 타고 육지로 나온 후 180㎞를 달려야한다. 페리를 기다리는 동안 기념품 상점을 들러보았다. 작은 나무 물컵 하나도 우리 돈 4만원, 랩족의 엉성한 가죽털신이 3만원, 비싼 물가다.

페리가 혼닝스보그를 떠난다. 노르카프와도 안녕이다. 이젠 귀로라는 실감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새롭다. 페리 안 카페테리아의 친숙한 풍경이 재미있다. 커피와 단 케이크를 먹으며 속삭이거나 포옹하는 연인들, 장난치며 떠들어대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젊은 부부들, 커플 룩에 손을 꼭 잡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노부부들. 이렇게 만나고 사랑하고 늙어 가는 우리네 삶이 다 있는 페리 안 풍경이 새삼스럽다.

알타로 가면서 노르웨이의 자연을 감상한다. 구름 낀 하늘 아래 장엄하게 이어지는 바위산 정상의 흰눈. 다양한 숲의 변화와 피오르드의 끝없는 굴곡, 피오르드 연안에 그림처럼 모여 있는 색색의 집들, 화가가 그려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오르다 보면 내리막이고 굽이쳐 돌다보면 또다른 풍광에 감탄은 이어지고 지루할 새 없는 변화에 점점 노르웨이 자연에 빠져든다. 하루 400㎞ 이상을 달려도 피곤함을 못 느낀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강가 곳곳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이들의 삶이 또 부러워진다. 알타 못 미쳐 넓고 큰 캠핑사이트에 숙소를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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