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전시실의 놀라움이 2차대전후 폐허에서 새로움을 말한다.

*1996년 7월 9일 화요일. 비. 갬 (여행 12일째)

 

로바니에미-이나리, 주행거리 352㎞, 주유량 36.40ℓ, 금액 FIM216-

 새벽에 추워서 깼다. 으스스한 추위에 사우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우나 시설이 되어있는 통나무집으로 갔다. 뜨끈하게 사우나를 하고 자작나무 잎으로 온몸을 두드리고 밖으로 나오니 몸이 한결 가뿐했다. 좋은 컨디션으로 아침 9시 캠핑사이트를 떠났다. 로바니에미로 가는 마음까지 개운하다. 로바니에미는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해 철저히 파괴 된 도시로 알바르 알토라는 핀란드 건축가에 의해 다시 재건된 도시라는 것보다도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는 노르카프가 이제 코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노르카프라는 말이 조금씩 다가온다. 힘을 내자.

로바니에미는 잘 정리된 깨끗한 도시다. 어딜 가나 서양사람인 관광객들로 만원이고 동양사람은 우리뿐이다. 그 흔한 일본인 관광객들도 이곳에선 볼 수가 없었다. 이 도시의 볼만한 곳을 체크해 놓았기 때문에 차근차근 한 곳씩 들러 보기로 했다. 남편은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건축물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나 문화에 더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가끔 부부가 티격태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은 남편의 관심사인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르 알토(1898년∼1976년)가 설계한 라피아 하우스(Lappia House)를 먼저 보기로 했다. 노르카프에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나에게 여유와 너그러운 심성을 되찾게 해주나보다.

로바니에미의 라피아 하우스

 

오우나스바라 언덕에서 본 로바니에미

라피아 하우스는 알바르 알토의 설계로 1975년에 완성된 건물로 극장·회의실·학술연구회장·콘서트 홀 등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세련미가 돋보이는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특히 이곳은 라풀란드 주문화의 저변확대와 학술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곳으로 홀에서 전시되고 있는 랩(lap)족에 관한 사진전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68세의 사진작가는 5년 동안 랩족의 땅인 라풀란드(Lappland)에서 랩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찍은 그들의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었다. 라풀란드는 랩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 넓게 펼쳐져 있다. 라풀란드에 사는 사미(Sami)족은 에스키모와 마찬가지로 아시아계의 민족으로 순록을 방목하며 살고 있다. 방하와 눈, 사미족의 천막과 순록 그리고 그들의 생과사를 리얼하게 소개하고 있는 사진전이 퍽 인상적이다.

 

로바니에미의 루터 교회

 

2차 대전 전몰 장병 묘역

시내 중심에 있는 루터교회와 교회 뒤뜰에 있는 2차 대전 때 전사한 젊은 군인들의 묘를 들러 보았다. 묘 앞에 붉게 피어있는 꽃들이 핏빛으로 보이고 슬픔에 젖은 가족과 눈물을 흘리는 전우들의 굳은 표정이 생동감 있는 동상 앞을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묘비의 나이는 대개 22살이나 25살의 젊은이들이었다. 우리 나라의 국립묘지에도 6.25 때 전사한 군인들의 나이가 적혀있다. 아까운 청춘들이다.

죽어 누운 전우를 내려다 보는 2명의 병사상

묘역을 지켜보는 슬픔에 젖은 가족상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고 파괴된 슬픈 인간의 역사는 예로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또 내일도 계속 될 것이고 이에 희생되는 많은 인간들의 슬픈 눈망울을 또 어느 조각가는 조각하게 되겠지. 아르메니아, 보스니아 등 지금도 얼마나 많은 명분 없고 무모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가. 그리고 희생되는 선량한 시민들…. 전쟁을 겪은 나는 가슴이 아팠다.

 

자연사 박물관 악티쿰의 입구

 

좌우에 지하 전시실이 있는 악티쿰 내부

악티쿰(Arktikum)자연사 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북극지방 및 라풀란드 생태계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있는 이 자연사 박물관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알바르 알토의 설계로 지어진 자연사 박물관은 고속도로 밑을 파서 만든 초현대적 시설을 갖춘 박물관으로 그 규모가 엄청났으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주위경관과 잘 어울리는 자그마한 유리관만을 지상에 드러나게 지은 그 발상이 파격적이고 압권이었다. 아직도 지하를 파서 계속 지어 나가고 있는 이 박물관은 북극권의 생성과 변화, 생태계, 자연, 생물 그리고 인간 등 모든 것을 총 망라해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해놓은 박물관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고 색다르며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핀란드의 저력과 비전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수많은 서양 관광객들로 만원인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아직 미완성인 이곳에 대한 자료를 구하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돌아가 책을 구해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바르 알토의 조형에는 자기나라의 풍토와 전통이 스며있고 인간적인 정감이 우러나있는 설계로 유명하다고 남편은 말한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핀란드라는 고유한 나라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하는 독특한 개성이 있다고. 알바르 알토의 유명한 말 "자연! 그것은 건축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다" 라고 한 그의 일관된 건축철학이 잘 드러난 알틱쿰 자연사 박물관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마구 파헤치며 시멘트나 철골로 인공적인 건축물을 무분별하게 짓는 우리 나라 실정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후회할 날이 곧 올텐데…. 핀란드에서 많은 감명을 받고 있다.

 

산타 할아버지와 같이

산타 마을의 노르카프 이정표

우리는 여기서 8㎞떨어진 산타클로스 마을로 향했다. 산타클로스 마을을 찾은 사람들은 아이들보다 노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 산타할아버지가 있는 사무실엔 산타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도 남편과 같이 줄을 섰다. 풍채가 좋고 인자하게 잘 생긴 산타할아버지를 만났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안녕하세요" 라고 한국말로 또렷하게 인사를 한다. 많은 관광객을 상대하다 보니 산타할아버지도 국제적이 되었나보다.

 

산타 할아버지가 계신 산타 오피스

 

산타 마을의 위도 표시 66° 33' 07"

핀란드의 산타클로스 빌리지 발상은 참 재미있다. 북극권이 지나가는 위도에 산타클로스 마을을 지어놓은 핀란드. 그래서 마을 한 가운데 흰줄이 그어져있고 이 흰 선에 북위 66도 33분 7초란 표시가 도로 위에 써있다. 이 선이 북극권이란 뜻이다. 이 의미 있는 지점에 산타클로스 마을을 만들고 세계각국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아이디어가 재미있었다.

 

산타 마을의 북극권 기념물

 

많은 관광객이 산타 마을에서 점심을 든다

핀란드는 산림과 호수의 나라다. 어디를 가나 풍부한 산림자원이 있어서 나무로 만든 물건들이 정말 좋다. 캠핑사이트 오두막이나 모든 시설들, 고속도로변 휴게소의 테이블과 의자 등 공공시설물까지도 고급스럽고 품위있다. 산타클로스 마을 선물센터에서 나무로 만든 작은 물컵 하나도 우리 돈 3만원이 넘는다.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나무로 만든 물건들이 쾌 비쌌다. 왜 그리 비싸냐고 물었더니 나무를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배거나 마구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나무는 아끼고 가꾸어갈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는 핀란드 사람들의 의식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이발로 시내의 한가한 모습

 

통나무 집을 전시 판매하는 통나무 사무실

우리는 산타마을 넓은 잔디밭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3시 이발로(Ivalo)를 향해 출발했다. 이발로까지는 286㎞를 달려야 한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자연. 하늘과 구름 그리고 호수와 산림. 자연에 취해 신선이 된 듯, 달리다 보면 200㎞는 어느새 지나간다. 이발로를 지났다. 최종목적지 이나리(Inari)까지 가야한다. 호수 옆 언덕에 지어놓은 여러 모델의 통나무집이 나그네의 마음을 붙든다. 우리 나라 수련장에 그대로 옮겨다 놓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말이면 가족들이 찾아와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갈 수 있는 멋진 장소가 될 텐데…. 콘크리트 벽과 너무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로선 모든 것이 훔쳐가고 싶을 만큼 부럽다. 자연스런 나무결을 그대로 살린 부드러운 곡선의 통나무집들. 창틀도 나무의 휨을 살려 반 듯 하지만은 않다. 자연스러움을 살린 편안한 디자인이 더욱 마음에 든다. 문의 손잡이도 나무모양을 살려 모양이 제각각이다. 예쁜 통나무집을 떠나면서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한 채만 달랑 들고 가는…. 이나리라는 호반의 도시까지 더 가서 핀란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낼 예정이다. 끝까지 화이팅하자!... 멀리도 왔다.

 

캠핑장의 이나리 호반

 

이나리 캐핑장의 공동 취사장

이나리라는 작은 도시의 초입, 캠핑사이트에 여장을 풀었다. 이나리 호수 옆에 있는 경관 좋은 곳이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이 캠핑사이트를 찾아왔다. 5만개나 되는 호수는 핀란드 인구 100명당 한 개꼴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핀란드는 호수의 나라다. 우리가 찾아온 이나리 호수는 호수 안에 300개가 넘는 섬이 있는 엄청나게 큰 호수로 관광용 수상비행기가 뜨기도 한다. 잘 생긴 캠핑사이트 주인은 한국사람은 처음이라며 반긴다. 호수 옆 작은 통나무집. 저녁식사 후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숲 속 통나무집에서 조용히 가족들과 여름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은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하다. 떠들거나 음식냄새를 피우거나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는 어른이나 흔히 우리의 유원지나 행락객들이 모인 곳이면 볼 수 있는 함부로 쓰레기를 버린다거나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태는 이곳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질서를 지키고 공공시설을 깨끗이 이용하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자세가 진정 정신적인 선진국임을 가는 곳마다 절실히 느낀다.

미끈한 최신형 벤츠자동차가 미끄러지듯 캠핑장에 들어온다. 중년부부가 내리더니 차의 뒷문을 연다. 잘 생긴 세퍼트 두 마리가 차에서 뛰어내린다. 부부와 두 마리의 개가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와 너무나 다른 문화가 생소하다. 애완동물과 함께 하는 부부의 여름휴가가 이방인의 눈엔 신기할 뿐이다.

내일이면 노르웨이로 간다. 핀란드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핀란드를 종단하면서 최첨단을 달리는 강인한 핀란드의 모습과 태고의 원시림과 순박한 사람들의 삶, 그리고 열린 사회의 포용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문화의 다양성, 사고의 다양성 등 우리와 다름을 곳곳에서 체험하면서. 오늘도 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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