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북극권으로, 밤에도 책을 읽고 산책하고

*1996년 7월 7일 일요일. 흐림. (여행 10일째)

 

헬싱키-멕스모, 주행거리 462㎞, 주유량 31.00ℓ, 금액 FIM167-

오늘은 헬싱키를 떠나 바사(Vasa)로 간다. 핀란드의 종단이 시작되었다. 헬싱키의 유스호스텔을 떠나는 마음이 또 섭섭하다. 짐을 싣고 주위를 몇 번 돈 후 유스호스텔을 떠났다. 헬싱키를 떠나기 전에 꼭 재킷 하나를 사고 싶었다. 스톡홀름도 그랬고 헬싱키도 비 때문에 기념품 하나 사지 못한 것은 접고서라도 여행 내내 춥고 비가 와서 서울서 가지고 온 잠바 만으론 안될 것 같고 또 싫증도 나고 해서다. 이곳은 토요일 오후가 되면 스톡크만 백화점도, 마켓광장 주변의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는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러나 문을 닫지 않은 가게를 봐두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재킷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숍에서 그냥 나오고 말았다. 별로 좋지도 않은 재킷이 60여만원이 넘었다. 스톡홀름도, 헬싱키도 물가가 상당히 비쌌다.

마켙 광장에 있는 하비스 아만다 분수

아테네움 미술관

여행기간의 ⅓이 지나고 있었다. 헬싱키의 중심인 마켓광장을 보고 아테네움 미술관으로 갔다. 핀란드 미술의 진수는 물론 고갱, 고호, 뭉크, 르가의 명화들을 많이 소장하고있었다. 북유럽 미술가들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나로선 화가의 이름이나 그림들에 대한 생소함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북유럽의 미술은 러시아에서도(페테르스부르크의 에르미따쥬 박물관)느꼈지만 깊고 무거운 분위기다. 낯선 이름, 낯선 표현의 소장품이 많은 갤러리에서 1시간 이상을 보내고 미술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동생(미대교수)의 작품전시회 팜플렛을 데스크 직원에게 주었다. 데스크 직원은 동양인의 섬유예술에 대해 흥미 있어 했다. 동생의 작품에 대한 안내를 잠시하고 우린 밖으로 나왔다.

헬싱키 국립 극장

 

헬싱키 원로원 광장

국립극장을 외부만 잠시 들러 보고 다시 원로원광장으로 갔다. 원로원광장은 헬싱키의 얼굴이고 시작이고 끝이다. 모처럼 비 개인 헬싱키 하늘이 맑다. 얼마만에 보는 햇빛인가! 핀란드 현대사의 상징이기도 한 원로원광장에 우뚝한 대성당 안에는 흰 제복을 입은 합창단원들이 분주히 제단을 꾸미고 있었다. 성당내부의 장식이 소박하다. 관광객들과 뒤섞여 분주히 제단을 꾸미는 합창단 소년의 해맑은 얼굴이 비 개인 하늘보다 더 맑다. 광장으로 나왔다. 그새 따스한 햇빛을 쪼이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부모와 산책 나온 사내아이가 무척 귀엽다. 어디서나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은 없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우리는 헬싱키와 작별했다.

 

 헬신키 올림픽 경기장

올림픽 경기장 내부

우리 나라가 전쟁 중이던 1952년에 올림픽이 열렸던 헬싱키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갔다. 그리 크지 않은 스타디움이 아담하다. 스타디움 타워 11층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바다와 호수와 숲과 파란하늘이 어우러진 도시 헬싱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톡홀름에서도 느꼈지만 헬싱키도 조화로움이 얼마나 멋짐 인가를 또 한번 느끼게 된다. 건물들이 개성이 있으면서도 도시전체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멋이 은근하다.

 

올림픽 경기장 유스호스텔

 

헬싱키 아이스 링크

 오늘은 어린이 야구단의 축제가 있는지 색색의 단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단기를 들고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입장한다. 특별한 축제의 날인가보다. 핀란드 역경의 역사의 상징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은 핀란드사람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올림픽을 계기로 핀란드는 강한 민족국가로 거듭났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1988년 올림픽도 우리에게 도약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나라도 개인도 이처럼 도약의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1983년 내가 처음 해외여행을 했을 때는 어디를 가나 일본사람들로 넘쳐 났었다. 그러나 우리가 김포공항을 떠나는 그 날의 공항의 인파는 이제는 우리도 지구촌의 한 가족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약의 계기가 필요한 삶. 나는 무엇을 위한 또 다른 도약을 위해 이렇게 떠돌고 있을까? 햇빛이 쨍쨍 난다. 햇빛을 보니 힘이 솟는다. 드디어 핀란드 종단이다!

오후 3시경 바사를 향해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둘만의 여행이라서 때로는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늦은 점심에 과식까지 했고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남편이 졸까봐 나는 쉬지 않고 수다를 떤다. 오늘부터는 정해진 숙소 없이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자야 한다는 막연함이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E12번(국내 3번)도로를 따라 달렸다. 검푸른 원시림이 끝없이 이어지는 3번 도로를 달리며 원시의 냄새뿐인 자연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문명과 멀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우릴 긴장시킨다. 호수와 숲 그리고 원시림 사이로 간간이 마을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고 여름휴가를 떠나는 차량들을 만나면 반가워 절로 손이 흔들어진다. 피서철 영동고속도로의 꽉 막힌 도로사정은 꿈결인 듯 먼 얘기고 사람의 흔적일랑 찾을 길 없는 원시림 속을 달리며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핀란드 제2의 도시 탐페레(Tampere)에 도착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온 편안함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익숙한 모든 것이 그리움이 될 줄이야….인구 17만 명인 예스러운 작은 도시 탐페레는 오래된 대성당과 1907년에 지은 초현대적인 칼레바(Kaleva)교회가 유명하다. 우리는 대성당을 먼저 찾아갔다. 남편은 전생에 운전기사였거나 떠돌이였나 보다. 초행길도 실수 없이 잘 찾아간다. 물론 출발하기 전에 갈 곳에 대한 사전준비를 하지만 어쩌다 실수를 하기도 하는데(물론 큰 도시에 갈 때는 복잡한 거리를 놓칠 때도 있지만)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닌 지방의 소도시에서는 우리의 목적지를 단번에 찾아간다.

대개 도시는 중앙에 도시의 랜드마크인 우뚝한 교회나 성당이 있고 그 종 탑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림으로도 그 쪽 방향을 향해 가면 되기도 하고, 도로의 교통흐름이 우리처럼 무질서하지 않다는 것도 일조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밴 정신적인 선진 자세이다. 미숙해 보이는 운전자를 보면 다가와 친절히 가르쳐준다. 어디를 찾느냐고. 그리고 먼 거리가 아니면 앞장을 서 준다. 자연의 넉넉함만큼 인심도 넉넉하다는 말이 진리임을 여행을 하면서 실감한다. 우리도 옛날엔 넉넉한 인심이 넘치던 나라였는데…. 나무를 심고, 자연훼손을 막고, 환경을 보호해야만 인간성회복의 지름길이 될텐데…. 금수강산인 본래의 우리 산하를 다시 만들어야 할텐데….

 

탐페레 대성당

 

대성당의 내부

 대성당의 천장엔 뱀이 그려져 있고 정면 단상엔 십자가대신 나신이 그려진 대형그림이 있다. 푸른 나뭇잎과 동아줄을 들고 있는 벌거벗은 소년의 그림이 성당 내부에 빙 둘러 그려져 있고 나신과 뱀은 신성과 악성을 상징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성당의 내부가 이렇게 꾸며질 수도 있구나 하는 충격과 함께 고정관념이 깨진다. 퍽 인상적인 성당이었다. 역시 핀란드는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나라다.

 

탐페레 칼레바 교회

 

칼레바 교회의 내부

 칼레바 교회도 퍽 인상적이다. 현대적인 실내장식으로 유명한 교회인데 교회의 간결한 실내장식과 파이프 오르간이 심플하다.

탐페레를 떠나 바사를 향해 달린다. 휴게소에서 차에 기름도 넣고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장작을 파는 휴게소 코너를 보며 점점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한한 원시림 사이로 난 길을 덩그렇게 우리만 달리고 있을 때가 점점 더 많아서 쓸쓸하고 외롭기도 하다. 바사를 지나 8번 도로를 따라 코카라(kokkala)를 향해 북동쪽 길로 들어섰다. 백야현상으로 날은 저물 줄 모르는 핀란드의 자연 속을 하염없이 달린다. 밤 10시가 다 되었는데 남편은 눈부신 태양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고 운전을 한다. 캠핑사이트 표지가 있나를 살피며 달린다. 오랜 운전으로 피곤해졌을 남편의 나이가 새삼스럽다.

날은 밝지만 어디든 숙소를 정해야 하는 시간, 초조로움으로 마음이 급해졌을 때,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카페를 겸한 인포메이션 센터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워서 우리는 차를 세우고 뛰어 들어갔다. 통통하고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가 막 문을 닫으려다 우리를 맞는다. 순박한 얼굴과 미소가 그야말로 무공해다. 아가씨 뿐 아니라 카페안도 동화 속 세상 같다. 소박한 탁자마다 유리컵에 노오란 들꽃이 꽂혀있고 벽에는 옥스포드지에 십자수를 놓은 벽걸이가 풀을 빳빳이 먹여 손질된 채 걸려있다. 낡아서 하늘하늘하다. 누가 얼마나 오래 전에 놓은 십자 수일까? 나도 중학교 때 십자수로 책상보를 놓은 적이 있는데 십자 수를 놓은 사람도 지금의 내 나이만큼 됐을까? 꾸민 흔적이 없어 오히려 친근한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시켜 마시며 잠시 먼 옛날로 돌아간다. 통통한 아가씨를 보고 오늘 밤 잘 숙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막스모의 오두막 집

숲 속에 쌓여 있는 우두막 집

카페 아가씨는 500m 떨어진 산 속에 Cottage가 하나 있는데 지금 비어있다고 했다. 하룻밤 자는데 우리 돈 약 4만원 정도다. 이젠 됐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오늘 밤은 여기서 잘 수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우리 차로 아가씨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오두막은 외딴 산 속에 덩그렇게 장난감처럼 그렇게 있었다. 아가씨는 카페에서 가져온 카보온 물통을 우리에게 주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아가씨가 빌려준 커다란 보온병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곳은 식수가 없고 산 속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물이어서 설거지 할 때나 쓰라고 했다. 화장실은 숙소 옆 작은 오두막으로 그야말로 퍼세식 화장실이다. 횟가루를 넣은 깡통과 풀을 베어 둔 그릇이 있었다. 여기는 막스모(Maksmo)라는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 오지나 노천에서 잘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한 우리는 텐트며 취사도구며 야영에 대비한 실질적인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야영이 아닌 작지만 오두막에서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가씨가 가고 달랑 우리 둘만 남았다. 여기까지 올 동안 여러 번 고비를 넘겼지만 그래도 기가 막혔다. 인가라고는 없는 외진 이 곳에서 원시인이 된 듯 산 속 오두막에 달랑 둘만 남겨진 우리가 외롭고 쓸쓸해서 자꾸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삼키고 우선 모기향을 여기저기 피우고 저녁밥은 짓기 시작했다. 시퍼런 이끼가 낀 우물에서 퍼온 물에 뜬 낙엽을 걷어내고 쌀을 씻고 야채와 과일을 씻고 늦은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우리는 원시림 속의 원시인이 되어 낯선 핀란드의 오지에서의 밤을 맞고 있었다. 지구의 한쪽 끝인 여기까지 와서 말이다.

저녁밥을 먹고 난 지금 시간이 12시 30분이다. 밖은 아직도 훤해서 창 밖의 나뭇잎의 윤기까지도 그대로 느껴진다. 작은 오두막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꼬마 식탁과 두개의 의자, 낡았지만 깨끗한 긴 소파와 낡은 가운데가 푹 꺼진 구식 침대가 한쪽에 놓여있고 겨울에 사용할 난방용 구형 무쇠 난로가 우직하다. 종이를 넣고 불을 붙이니 활활 잘도 탄다. 오두막 한구석엔 물건을 넣어두는 핀란드 전통가구인 나무함이 있고 선반엔 크고 작은 접시들이 가지런하다. 창문엔 레이스 커튼이, 식탁 위 등도 예스럽다.

한시가 넘은 시간. 우리는 일기를 쓴다. 세상 밖으로 유배된 듯 정막에 쌓인 밤, 오지 속 낯선 문화가 점점 더 잠을 앗아간다.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했던 마음의 각오는 모래성 쌓기 였다. 사람냄새라곤 어디에도 없는 현실 앞에서 허상처럼 마음의 각오가 무너진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오히려 사치스럽다. 얼마나 더 이런 밤을 보내야 할까 라는 절실한 명제 앞에서 우리의 의지는 너무도 무력했다. 천둥번개가 치던 날 우린 서울을 떠났었다. 생소함과 정적과 인적 없음이 천둥번개보다 더 두려웠다. 잠은 오지 않고 우리는 모기향을 들고 아직도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훤한 빛이 있은 오두막 주위를 돌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책을 읽듯 그렇게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오두막주위를 맴돈다. 핀란드 깊은 산골까지 와있는 우리의 끼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까지 발동할까? 밤 1시가 넘었는데도 날이 훤한 밤이 신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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