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1937-1943

 

 

 

1937년 3월 4일

서울시 종로구 종로4가 69번지에서 아버지 정해창(鄭海昌)과 어머니 민억만이(閔億萬伊)의 7남매중 3남으로 태어났다.

돌이 되기 전 어머님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아버님께서 직접 촬영하셨다.다소곳하신 어머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어린 나는 무엇 인가를 응시하고 있다.

당시 아버님께서는 사진에 전념 중이 셨으며, 1926년 예술사진 전람회를 우리나라 최초로 여셨다.

  두 살 때의 사진인데. 앞에 앉아 계신 분 중 왼쪽 분이 할머님이 시고,  오른 쪽 분은 할머님의 올케되신다.

뒤에 서 계신 분 중 왼쪽이 어머님이시고, 가운데는 작은 고모님이시고, 오른쪽은 큰 고모님이시다.

큰 고모님께서는 우리나라 전각의 대가이신 김태석씨의 며느리 셨으며, 작은 고모부님은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약학 박사이신 이남순 박사이시다.

두 분 할머님 사이에서 비스듬히 서있는 나의 모습이 지금 보아도 귀엽기만 하다.

 

  

1939년 아버님께서는 제4회 예술사진 개인전을 당시 서울에서 제일 큰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여셨다. 일본이 통치하던 시대라서 통제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남기시려고 애를 쓰셨다. 당시 전람회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어서 아버님의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다.

제4회 사진전람회를 여신 2년 후인 1941년에는 서예와 전각 작품으로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전람회를 여셨는데, 그 기념으로 우리 온 가족이 전람회에 참석 한 후 백화점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모처럼 나들이를 한다고 정장을 한 모습을 바로 아래 동생과 같이 백화점 사진관에서 사진으로 남겼는데, 내 나이는 만 네 살이었고 동생의 나이는 만 두 살로, 손을 꼭 잡고 있다. 막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사진이다.

 

유년 시절 이야기1  안과병원

  어렷을 때에는 대문 앞 골목에서 친구들과 노느라고 항상 손발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그 손으로 무의식중에 눈을 비비다 보니 눈 병이 나는 경우가 많아서, 작은 형님이나 작은 누님(내게는 위로 누님 두분과 형님 두분 그리고  아래로 동생 둘이 있다)과 같이 안국동에 있는 아버님 친구분이 하시는 안과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종로4가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화신백화점에서 내려, 전차를 갈아타고 한 정거장 가서 안국동에서 내려, 비원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병원이 있었다. 병원에서는 항상 유리 주전자의 물(?)을 눈에 넣고 병원을 나서면 눈에 안대를 하여서 잘 보이지 않을 터인데도  어찌 그리도 그 무서운 개를 잘 발견했는지,개가 있다고 작은 누님이나, 작은 형에게 안아 달라고 떼를 써서 안겨서 전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초등학교 가기 전 어렸을 때에는 정말 개를 많이 무서워 했었다.

 

유년 시절 이야기2  칼집도 쇠

어린 시절 나의 집의 구조는 한옥으로 뒤 채에서 사랑채의 아버님께 어리광을 부릴 수가 있었다.

  당시 나와 내 바로 아래 넷째 동생은 아버님께 쇠로 만든 칼을 사 달라고 졸랐는데, "칼도 쇠, 칼집도 쇠, 칼쓰바(일본어)도 쇠 사주세요."라고 매일 졸랐는데, 당시 일제하의 경찰관이차고 다니던 칼을 사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위험한 장난감은 사주지 않으시니까, 우리는 할 수 없이 사과 궤짝의 송판을 잘라서 나무 칼을 만들어서 칼 싸움을 하면서 놀았다.

  후에 넷째 동생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졸업식 때에는 생도대장으로 그 "칼도 쇠, 칼집도 쇠,칼쓰바도 쇠"인 세이버를 가지고 지휘를 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으로 근무시에는 장군으로 장군도(將軍刀)를 하사받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아버님께서 직접 찍어서 현상 및 인화를 하신 할아버님(鄭鐘斗)과 할머님(李玉增)의 사진이다. 당시 할아버님께서는 서울 종로4가 로타리에 있던 원제약방(元劑藥房)을 운영 하셨다. 서울에서 원제약방과 천일약방(天一藥房)이 쌍벽을 이루는 약종상이었다. 지금도 서울에 같은 뿌리의 한약방이 남아있다.

 할아버님께서는 일남이녀를 두셨는데, 아버님께서는 부자 집 외아들로 원제약방을 이어 받지 않고, 당신이 원하시는 당시로서는 첨단인 사진, 전각, 서예 등 예술 계통의 삶을 사셨다.

  

  위의 봉투는 할아바님께서 운영하셨던 원제약방의 우편 봉투이다. 왼쪽은 전면이고, 오른쪽은 후면이다. 후면에 당시의 원제약방에서 하는 영업인 內外藥種直輸入(내외약종 직수입), 有名賣藥特約乾材局(유명매약 특약 건재국)이있고, 그 밑에 상표인 元(으뜸 원)자를, 아래 오른쪽부터 주소인 京城府鐘路四丁目百貳拾番地(경성부 종로4정목 120번지) 옆에 괄호 안에 舊梨峴四街里東隅(구이현사가리동우)라 하였는데 이는 종로4가 사거리인 배우개 사거리의 동쪽 모퉁이라는 뜻이다. 상호는 元 濟 藥 房(원 제 약 방)이고 전화는 광관문 1858번이고, 우체국의 이체구좌인 振替口座(진체구좌)는 경성 2310번이고, 電信略號(전신약호)는 "원" 또는 "뎡"이다. 전신 약호의 "원"은 원제약방의 "원"이고, "뎡"은 할아버님의 함자인 鄭鐘斗(정종두)에서 당시 "鄭"자를 한글로 "뎡"이라 한데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위의 서류는 光武八年四月(광무8년4월)에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이 발행한 증조부이신 鄭在容(정재용)의 호적표이다. 1904년 서울시장이 발행한 것이다. 맨 위의 漢城府東署(한성부동서)라고 "東"자를 써넣은 것으로 보아 다른 署(서)도 있었던 것같고, 또 한성부 로고라고 생각되는 문양이 가운데에 있다. 그 밑으로 주소 표시인데, 당시의 주소 표시를 알 수가 있다. 다음으로 호적표라고 제목과 호수가 있고, 戶主(호주) 정재용 왼쪽으로 父 鄭宜永(정의영), 生父 鄭宜溫(정의온), 祖 鄭桂秀(정계수), 曾祖 鄭瑋(정위) 및 外祖 朴信源(박신원)은 務安 朴씨란는 것도 명기되어있다. 여기에서 정재용 당신이 정의온의 아들로 태어나서 문중인 정의영의 양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주 밑에는 호주의 당시 나이 52세, 本은 경주임을 명기하고, 同居親屬(동거친속)에는 妻 李씨 54세, 子 鐘斗 26세,자부 李씨 28세, 孫子 8세, 次孫 4세로 되어있다. 그 아래에는 학력으로 幼學(유학)이라 했는데, 어릴 때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그 밑으로 前居地(전거지) 즉 먼저 주소는 山林洞(산림동)이고 移居月日(이거월일) 즉 이사한 날은 壬寅二(임인이)로 1902년 2월이다. 왼쪽으로 寄口(기구) 즉 얺혀 사는 식구 남, 여 항목이 있고, 庸男(용남) 즉 머슴 숫자 항목, 傭女(용녀) 즉 하녀 숫자 항목이 있다. 現存人口(현존인구)는 가족의 수를 남녀 별로 분류 했고, 家宅(가택)은 己有(기유) 즉 자기소유와 借有(차유) 즉 임대를 분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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